예수의 길, 길 위의 예수

by God'sShadow posted Sep 19, 2020


 

넓게 보면 길 위에 선 예수의 행보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을 향하다가 다시 갈릴리로 회귀하는 구도를 취한다. 그가 갈릴리에서 생명과 살림의 사역에 전력했다면 예루살렘에서는 죽음과 죽임의 수난을 맛보았다. 죽음의 질곡을 벗어나 다시금 되돌아간 갈릴리에서 예수는 그 제자들에게 부활의 꿈을 그 생명 사역의 유산과 더불어 전수시킨다. 갈릴리의 여러 성읍들이 '지방'이고 예루살렘이 '중앙'이라고 간단히 양분하여, 전자가 평화와 정의의 터전이었고 후자는 폭력과 살육의 아수라장인 양 간주하는 것은, 물론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역사적 현실과 반드시 합치되지 않는다. 갈릴리는 갈릴리대로, 예루살렘은 예루살렘대로, 그 보행적 삶의 지형에서 보면 절망과 희망의 명암이 교차하는 엇갈린 길들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예수의 발걸음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축으로 삼아 오가는 단순 명쾌한 직선의 보행을 추구하지 않았다.

 

가버나움이 갈릴리 사역의 근거지가 될 법했던 까닭은 일찍이 나사렛에서 유년을 보낸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공생애를 시작한 뒤로 가족들을 데리고 그곳에 집을 한 채 마련하여 이주한 것이 계기가 된 듯하다. 그 역동적인 보행의 길은 갈릴리 지역에서만 맴돌지 않는다. 그는 요단강 동편의 벳세다와 데가볼리 지역의 가다라로 향하며 북서쪽 지중해 연안의 두로와 시돈까지 원족의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헐몬산 기슭의 가이사랴 빌립보도 갈릴리의 친숙한 곳과는 동떨어진 비교적 먼 북방의 도시였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길에 들르게 된 사마리아는 유대인으로서 접촉하기 찜찜한 이단의 땅이었다.

 

이렇듯, 갈릴리의 향토적 경계를 집적이며 행정 구역상으로, 혈통상으로,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을 찾아가 바지런히 천국 복음을 전한 예수의 행보에는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비교하여 분명히 유다른 면이 있었다. 정통 유대교와 예루살렘 성전과 이를 자랑삼는 선민 유대인들의 견지에서 예의 지역들은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고, 그 지역에서 예수가 찾은 사람들은 대체로 배척당하는 이방인들이거나 소외된 병자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유대교와 예루살렘과 유대인을 먼 반경에서 감싸고 있는 당시의 주류 문화 헬레니즘의 일차적 수혜 대상도 아니었다. 이렇게 이중 삼중으로 시선의 골짜기에서 관심 밖의 사소한 것들로 쳐 박혀 살던 그들을 예수가 몸소 찾은 것은 시혜적 입장에서 보면 긍휼과 사랑의 발로였음이 분명하다.

 

 

출신 배경과 태생적 환경으로 보아 예수는 영락없는 유대인이었고, 유대교의 반경에서 사유했다. 그런 그에게 종족적, 문화적, 신학적 경계를 뛰어넘고 규범화된 각종 통념과 금기의 틀을 깨려는 시도는 마냥 간단하고 용이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생래적 삶의 조건을 넘어 모든 인간을 껴안는 보편주의적 이상을 그의 보행으로써 키워갔으니 그 끝간 자리에서 마침내 유대교와 헬레니즘 사이에 제 3의 길을 낸 그의 후예들에게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게 된 것이다. '발자취'... 그렇다. 예수의 신학에는 분명 그가 낸 길이 신흥 종교로서의 ''가 되기에 앞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걸어다닌 발의 자취, 그 땀 냄새 나는 형적이 숨어 있는 것이다. 예수를 신학사적 맥락에서 조명할 때 그의 신학을 제도권 내의 옹색한 틀 속에 자리매김하기보다 물처럼 거침없이 흐르는 발길의 도상 위에 풀어놓아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수가 발품을 팔며 걸은 길들, 그 보행과 유랑의 여정에서 그가 낸 새로운 길의 오롯한 자취를 떠올리며 나는 나를 포함하여 이 시대에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이들이 걷는 그 일상적 폐쇄 회로를 안타까이 반추해 본다. 그 단조로운 일상의 숨구멍은 인근의 산림 속을 걸으며 내 삶이 과연 '신앙적'이고 '건강'한가 묻고 기도의 자세를 가다듬는 자기 성찰의 산행길이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며 반 고비를 넘어 나그네 세월을 의식하는 나는 이제 내 삶의 일상적 반경을 넘어 새로운 경계로 접어드는 모험을 애써 경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더 이상의 실험이 없는 둔탁한 언어로 성찰조차 타성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 위태로운 위기 의식과 문제의 진단에 예수의 길, 길 위의 예수가 보여준 그 씩씩했던 팔레스타인의 도전적 행보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이다.

 

예수의 그 길은 언제나 우리가 얼마나 자신의 태생적 존재 여건, 인습화된 사유의 반경을 넘어 원근의 길을 두루 개척하고 걸으면서 얼마나 자유롭고 자애로워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아프게 부대끼게 한다. 그 쓰린 아픔조차 없다면 예수의 후예들은 그리스도의 ''를 말하면서도 정작 그 ''가 자생한 이 땅의 지형, 곧 역사적 예수의 보행에 담긴 뜻을 전혀 모르는 셈이다. 그러니 그 와중에서 말하는 예수로 말미암는 희망의 미래란 제 아무리 절실히 읊어대도 삶의 실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허울 좋은 레토릭이 아닐 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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